한국 힙합의 로컬라이징과 우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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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서핑을 하다가 한국 힙합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물론 이건 조크다. 힙합은 주류 음악이 됐고 힙합을 즐겨 듣는 대중은 많다. 하지만 이건 신랄한 조크다. 아닌 게 아니라, 힙합을 흥미로워하는 대중만큼이나 힙합을 거북해하는 대중이 많다. 한국 래퍼들은 밑도 끝도 없이 센 척이나 하는 허세꾼이란 것이다. 까놓고 말해 ‘힙찔이’다. 이 땅에 힙합이 정착한 지 이십 년이 지났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힙합에 면역되지 못하고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걸까.     


<쇼미더머니> 시대가 열린 후 방송 흥행을 위해 디스와 스웨거 같은 요소가 자극적으로 선별 노출됐다는 사실이 한 이유일 것 같다. 하지만 궁극적인 답을 알려주자면, 장르 문화를 이식하는 지역적 조건, 현지화(localizing)의 문제다. 한국 래퍼들이 유별난 게 아니라, 힙합 가사는 원래 마초적이고 공격적이다. 다만 미국 힙합은 이런 텍스트를 정당화할, 텍스트를 낳은 콘텍스트를 갖고 있다. 힙합의 발상지는 뉴욕의 사우스 브롱크스라는 슬럼가다. 미국 흑인들은 신대륙 시대에 노예 무역선에 실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건너간 후 줄곧 다인종 국가의 밑바닥 계층으로 살았다. 그들이 사는 슬럼가는 범죄와 가난, 마약이 어슬렁거리는 공동묘지 같은 도시다. 소위 말하는 블랙 뮤직, 래퍼 자신이 가사를 쓰며 사적 화자의 경험을 밝히는 힙합에는 특수한 지역 공동체의 현실이 장렬하게 들끓는다. 이런 장르적 정체성을 음악으로 서사화하는 아이콘이 바로 흑인 거주지를 표상하는 게토와 스트릿이다. 미국 래퍼들은 말로만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총에 맞아 사람이 죽는 걸 보며 자랐다. 내가 얼마나 불행했는지, 그곳에서 어떤 수난을 돌파하며 살아남았는지, 내가 얼마나 위험한 남자인지 노성을 토하고, 남근과 폭력을 찬미하는 장르적 관습은 이렇게 태동했다.     


따라서 다른 국가 공동체, 지역 공동체에서 힙합이란 장르 음악을 창작하는 이들은 장르의 사운드적 재현과 서사적 재현이 일치하는가라는 곤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알다시피 한국은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좋은 국가 중 하나다. 이곳에는 마약도 총기도 없고 빈민가도 없다. 한국 래퍼들은 부모님에게 용돈을 타 쓰며 급식을 먹고 정규 교육을 이수한 샌님들이다. 그들이 힙합과 더불어 자란 고향은 사우스 브롱크스가 아니라 힙합 플레야 국힙게와 자녹게, 인터넷이다. 게토의 음악을 만들지만 게토라는 공간이 없는 나라에서, 하드코어한 가사가 수입되는 와중 가사의 기의는 거세당하고 기표만 살아남아 음악적 스타일과 클리셰로 쓰인다. 아무리 센 척을 해봐야 맥락이 없는 "아무도 뭐라 안 하는데 혼자서 화난"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여튼 '화를 내기' 위해 허수아비를 향해 종 주먹질하고, 별 두서도 없는 과시형 가사를 쓰고, 심지어 싸이월드 다이어리 험담이 비프로 비화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본토 힙합의 제왕 제이지가 "코카인을 팔아보니 CD를 파는 법도 알겠더군. 난 사업가가 아냐 사업 그 자체지(“I sold kilos of coke, I'm guessin' I can sell CD's. I'm not a businessman; I'm a business, man!")라고 뱉으면 범접할 수 없는 '스웨거'가 흘러넘치지만, 한국 MC들은 스웨거는 부리고 싶은데 근거가 될 배경 서사가 없으니 눈알만 부릅뜬다.

     

이건 미국 MC들이 모조리 갱스터란 말이 아니다. 마약왕을 자부하다 교도관 출신인 게 탄로 나 개망신당한 릭 로스의 경우처럼 갱스터는 자격 있는 자가 쓰는 왕관인 한편, 갱스터 가사는 연기자가 배역을 수행하듯 역할 유희로 소비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엔터테인먼트에 개연성과 몰입감을 받쳐 주는 콘텍스트를 지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고담 시도 배트맨도 없다. 하지만 서부 개척 시대와 연방 정부 수립 이래로 자경단이 활동한 역사적 ᆞ사회적 배경이 있다. 한국처럼 중앙 권력의 장악력이 촘촘하고 치안이 좋은 나라에선 <배트맨> 같은 자경단 서사가 성립하기 어렵다.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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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쩌자는 말일까, 이곳엔 게토가 없으니까 게토의 음악 같은 건 집어치우자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스타일과 클리셰를 재현하는 데도 의의가 있다. 현재 힙합의 수요가 확장된 건 껍데기의 요염한 감촉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만큼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 힙합은 스타일과 클리셰에 지나치게 편중된 상태다. 게다가 이런 양식적 매력도 콘텍스트의 차이 때문에 몰입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요령 있게 처리해야 제대로 연출할 수 있다. 논점의 핵심은 현재 많은 한국 래퍼들의 작업물에서 로컬라이징이란 의제를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로컬라이징은 하나의 제약 사항이다. 창작에 따른 제약은 창작의 전망과 행동반경을 좁히는 장애물이지만, 창작자에게 미션을 제시하며 영감과 도전의식을 북돋기도 한다. 형형색색으로 엉클어진 큐브를 맞추듯 좁은 조건을 뚫어내며 창작은 고차원의 작업으로 승화되고, 그 미션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클리어 해 보이는 묘미도 있다. 이건 랩 가사를 쓰는 데 라임이란 제약이 붙는 것과 그 뿌리에서 다를 것이 없다. 서로 다른 지역적 조건을 간파하여 장르적 변용을 이루거나 그 조건을 뛰어넘으며 매력과 설득력을 갖춘 음악을 만드는 것이 한국 힙합의 미션이다.     


사실 이런 방식의 변용은 상이한 환경에서 창작을 하는 이상, 창작자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어느 정도 필연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게 꼭 난해한 숙제만은 아니다. 한국 힙합이 태동한 90년대부터 00년대 중반까지는 로컬라이징이 자연스럽게 이뤄진 시기다. 특히 00년 초반까지는 한국에 존재한 적 없던 이 미지의 음악을 어떻게 ‘한국적’으로 이해하고 다뤄 볼 것인지가 뜨거운 논제였다. 이후 소울컴퍼니 등의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은 동년배 10·20대들의 현실과 창작의 고뇌를 말하는 가사를 썼고, 무브먼트 소속 오버 래퍼들은 삶에 대한 자조와 격려, 사랑 이야기 같은 보편적 주제로 호소력을 얻었다. 이는 미국 힙합 신과의 음악적·산업적·문화적 격차로 미국적 관습이 도래하지 못한 저발전의 상태가 낳은 역설적 풍요였고, 한편으론 미국적 관습을 포기하며 별도의 의제로 창작 활동을 한 것이다. 가령 키비가 2003년 발표한 ‘소년을 위로해줘’는 남성성의 사회적 강요에 저항하는 소년의 우울함을 토로하는 노래다. 당시엔 미국 힙합에 접근할 수 있는 인프라가 빈약해 정작 창작자들이 미국적 관습에 어두웠을 것이란 추정도 해볼 수 있다.     


반면 비교적 번역하기 용이한 관습들은 익히 로컬라이징 된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관습들은 예외 없이 한국적 콘텍스트에 따라 변형되었다. DOC가 2000년에 발표한 '포조리'는 N.W.A의 'Fuck Tha Police'로 상징되는 미국 힙합의 치안 기구에 대한 대결의식을 재현한 시도라고 평할 수 있다. 게토는 다인종 국가가 관리하는 국가 내부의 식민지이고, 경찰은 불심검문과 상습적 구타로 흑인들을 억압해왔다. 'Fuck Tha Police'는 흑인들에 대한 치안 기구의 폭력 속에 태어난 트랙이다. N.W.A가 투어 공연을 할 때 경찰은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고 현장을 감시했다. 한국의 치안 기구는 국민들과 이런 억압적 관계에 있지 않고 강제력의 행사도 제한적이다. 오히려 ‘짭새’라는 멸칭에서 알 수 있듯 무능하고 부패한 공권력으로 조롱당하고는 한다. '포조리'가 야유하는 건 이런 공권력의 악취다. 'Fuck Tha Police'가 경찰의 인종 차별과 일상적 억압에 도전하는 곡이라면, ‘포조리’는 사회면 뉴스에 떠도는 거시적이고 단편적인 이슈(신창원 사건, 총기 발포 사고, 조폭과 붙어먹기)로 비리를 야유하는 세태 풍자곡이 되었다.     


이 대목은 힙합의 저항정신이란 관습과도 직결된다. 힙합의 저항정신이란 곧 미국 흑인들이 처한 인종적 소수자의 자의식이며, 억압적 백인 사회를 향한 분노다. 한국 래퍼들은 계층적 자의식이 없는 보편적 정체성의 자리에서 저항정신을 전용했다. 한국 힙합의 사회 비판은 본토와 다른 방식으로 변용됐다. 민주화 항쟁과 노동 운동에서 비롯한 저항적 민중문화의 코드와 결합하고(MC 스나이퍼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사로 지식인 이미지를 치장하고(타블로 'Lesson' 시리즈) 비민주적 정권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에 합류하고(이명박근혜를 비판한 트랙들, 제리케이의 ‘우민 정책’과 ‘하야해’) 보편적 이슈에 대한 사회 비평을 개진하였다(UMC UW 'Media Doll' 시리즈, 제리케이 ‘콜 센터’).     


한편 한국에선 인터넷이 힙합의 본거지로서 유사 게토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런 기능은 00년대 후반 경 심화됐고, 이를 주도한 것은 당대의 핵심 인물 버벌진트였다. 그는 자신이 겪은 수난의 무대로 스트릿이 아닌 리드머, 디씨 트라이브, 힙합 플레이야 같은 힙합 커뮤니티를 지목하며 네가티브한 에너지를 발사했다. 불특정 다수 커뮤니티 유저를 날 음해하는 '방구석 헤이러'라 부르는 한국형 배틀 랩의 관용구가 입안되었고 지금은 클리셰로 쓰인다. 같은 시기, 돈과 여자가 아닌 음악적 실력을 소재로 자기 과시가 재현되었는데, 유교적 위계질서가 힙합 신에도 뿌리내린 상황에서 이 새로운 관습은 스캔들과 해프닝을 일으키며 내부적 반발에 휘말렸다. 얄궂게도 버벌진트는 "한국화된 해외 음식을 경멸한다"는 비유를 입에 물고 장르의 원형을 관철해야 한다 주장하는 '장르 사대주의자'였다. 그런 그도 현지화를 통해서야 본토의 관습을 몸소 누려보는 소망을 이룬 셈이다.     


2010년대 <쇼미더머니> 시대가 열린 후 한국 힙합은 ‘전면적 미국화’라는 길로 진입했다. 허슬과 스웨거, 돈과 여자, 남근의 찬미 같은 개념이 무더기로 수입됐고, 이런 미국적 관습을 어떻게 로컬라이징 할 것이냐는 보다 까다로운 미션이 주어진 것이다. 동시대 래퍼 가운데 미국 힙합의 관습을 가장 열렬하게 신봉하는 음악가는 일리네어다. 그들은 스웨거 힙합이 한국에서 낯설던 2010년대 초반부터 초지일관 돈 자랑 가사, 으스대는 가사를 썼다. 그때만 해도 힙합은 비주류에 가까웠고 그들의 연 수익은 고작 1~2억이었다. 때문에 “지네가 지드래곤이야, 제이지야. 벌면 얼마나 번다고 돈타령을 해.”라는 리스너들의 불복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리네어는 부단한 창작과 자기 포장을 통해 몸값을 높여왔다. <쇼미더머니>의 도래에 의지해 이제 랩 머니는 수십억대로 치솟았고, 스웨거 힙합은 한국 힙합을 획일화했다. 이것은 도끼와 콰이엇이 본토의 관습을 선구적으로 퍼트린 결실이기도 하지만, 그들 스스로 본토의 관습을 설득력 있게 재현할 콘텍스트를 창출한 측면도 있다.     


재미있는 건 이런 집념에도 불구하고 일리네어조차 본토의 관습을 백 퍼센트 재현하진 않았다(혹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일리네어식 돈자랑 가사는 겸손을 강요하고 물질을 향한 탐욕의 드러냄을 배격하는 한국에서 사회적 거부감을 피하기 힘들다. 데프콘이 ‘프랑켄슈타인’으로 도끼의 졸부 근성을 디스한 건 그런 잠재적 여론이 개별 음악가의 창작을 통해 불거진 사건이다. 도끼가 이런 무형의 압박에 대답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의외로 바른생활 이미지다. 나는 남에게 피해도 안 주고 흥청망청 대지도 않으며 성실하게 산다고 웅변하는 것이다(“난 술 담배 안 해. 쌍스러운 욕도 입으로 안 뱉어. 난 싸우지도 않아. (...) 열심히 일하며 살뿐 낭비 않네.”, ‘111%’ 중에서) 본토의 래퍼들은 서슴없이 낭비를 자랑하고, 마약과 범법, 향락을 가사에 절여낸다. 하지만 도끼는 “마약 조사와도 검찰들은 날 못 잡네. 생긴 거완 다르게 바르게 살아왔네.”라고 자신이 사회 질서와 도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 점에서 일리네어의 돈벌이 캐릭터는 게토의 허슬러보다 근면한 젊은 사업가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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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거 힙합의 득세와 함께 한국 힙합의 미국 힙합 되기는 전면화했다. 스웨거 같은 주제의식에 머물지 않고 소재와 표현의 클리셰를 따라가고, 때론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을 따라 읊는 경우도 보인다. 이건 '힙합 LE 뮤비 자막' 인프라가 보급되어 본토의 동향에 용이하게 접근하게 된 세대가 주축을 이루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 중 하나는 자신의 출신지를 외치는 한국 래퍼들이 예전에 비해 늘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미국 힙합 신은 동부와 서부, 남부, 브루클린과 컴튼, 왓츠, 애틀랜타 같은 출신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그것을 비트 위에서 외친다. 저 도시들은 힙합의 발상지이거나 생활환경과 음악 활동이 연계된 토대가 단단하다. 하지만 로컬 신이 없다시피 한 한국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가사는 메아리 잃은 외침에 그친다.  

   

리듬파워가 방사능으로 활동하던 2010년에 발표한 앨범 ‘리듬파워’는 래퍼의 출신지를 본격적으로 외친 선구자격이다. 앨범에 수록된 ‘인천 상륙작전’은 월미도 바이킹과 오이도 같은 구체적 기호를 통해 지역색을 어필하는 데 성공한 편이다. 하지만 멤버 보이비는 힙합 LE, 힙합 플레이야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래퍼들이 출신지를 외치는 걸 따라 해 보고 싶었다’ ‘사실 인천에 그렇게 큰 의미는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로컬 신의 부재는 그 후 데뷔한 '힙합 LE 세대'에게서 적나라하다. 씨잼이 제주도에서 왔다고 말할 때, 제주도가 힙합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제주도에서 음악을 한 적도 없고, 자신이 만드는 음악에 아무런 지역색이 들어 있지도 않다. 심지어 창모는 자신의 동네 경기도 덕소리의 주변부적 성격을 강조하며 서울에서 귀하게 자란 알 수 없는 누군가를 "니 삶이 무슨 할렘이노?"라고 비난한다. 그렇게 치면 덕소리는 무슨 할렘인가? 그냥 수도권 변두리 중 하나지. 창모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 교습을 받을 만큼 곱게 자란 몸 아닌가? 한반도에서 물리적 악조건을 할렘에 비견할 수 있는 곳은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 밖에 없다. 다들 학교랑 학원을 오가다 홈레코딩 마이크 구입하며 랩 시작한 거 뻔히 아는데 저런 말을 하다니.     


한국 힙합 신에 로컬적 특색을 더하려 한 시도는 예전부터 드물게 있었다. 서울 홍대를 제외하고 로컬 신이라 할 만한 곳은 DMS 크루가 활동한 부산과 클럽 힙합 트레인이 있는 대구다. 이 두 지역 출신 뮤지션 다수가 언더 신과 상업 신에서 활동하고 있다. MC 메타와 이센스, 마이노스, 사이먼 도미닉, 킵루츠가 대표적이다. 이센스와 마이노스는 'U Never Know'에서 조인트 하며 'Represent 대구, Represent 힙합 트레인'을 외쳤고, 제이통은 자신이 South Side 남쪽(부산)에서 왔다며 구체적 캐릭터를 형상화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대구 사투리로 라이밍을 한 MC 메타의 '무까끼하이'다. 하지만 이런 간헐적 움직임이 일관된 흐름으로 지속되진 않았다. 로컬 신의 기반을 강화하기보다 중심부의 음악에 곁 반찬으로 차려졌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최근 나타나는 '출신지 Represent'가 주는 교훈은 이렇다. 어떤 장르적 요소를 재현할 때 자신이 음악을 하는 '장소'의 조건을 고려하여 음악적 내용과 맞물리도록 설계하지 않으면 재현을 위한 재현, 알맹이 없는 클리셰에 머문다. 더 나쁘게는 '본토 힙합'의 스웨거를 흉내 내보는 자기만족에 빠진다. 알다시피 이런 음악은 감흥이 아니라 실소를 준다. 다만 한국 힙합이 급격히 상업화·미국화하는 절정에 이른 지금 상황은 흥미롭고 말할 거리가 넘친다. 창작자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 수행하는 창작의 패턴과 자신이 처한 창작의 조건을 일깨워 주고, 짜임새 있는 음악을 만들도록 화두를 제시하는 것이 장르 비평의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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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처한 지역적 현실을 의식하고 장르적 로컬라이징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흔치 않은 사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블랙넛이고 하나는 <쇼미더머니>의 신성 우원재다.     


힙합에는 스트릿 크레드(street credibility)라는 관습이 있다. 직역하면 거리에서의 명성이다. 범죄와 마약, 가난의 소굴 게토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누가 더 위험하고 준법을 거역하는 삶을 살았는지 채점하며 남근의 크기를 겨루는 척도다. 말했듯이 게토 같은 빈민가-범법 지대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스트릿 크레드라는 개념도 성립할 수 없다. 거론할 수 있는 전과 이력이 없다 보니 스윙스처럼 ‘센 캐릭터’의 진정성을 증명하려고 학창 시절 일진이었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진다. 혹은 마약 전과를 가진 미국 래퍼는 스트릿 크레드를 가산받지만, 이센스는 울면서 참회의 기자회견을 했다. ‘모솔’에 ‘아싸’를 자처하며 남근의 강력함이 아니라 남근의 비루함을 고백하는 블랙넛은 이런 로컬라이징의 난관을 손쉽게 우회한다. 사우스 브롱크스가 아닌 인터넷 동호회가 장르적 발상지이며, 믹스테이프 배포와 MC들의 교류가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지역적 실정 또한, 자녹게 출신에 인터넷 하위문화를 재현하는 블랙넛의 캐릭터와 맞아떨어진다.     


블랙넛은 자신을 에미넴에 비견하고는 하는데, 사실 적절한 비유다. 인종적 정체성이 배타적이며 인종적 권력관계가 물구나무서는 블랙뮤직 커뮤니티에서, 백인은 음악적·남근적 자격을 인준받지 못하는 '소수 인종'이다. 라킴의 말처럼 나스가 거리에서 자라나 거리의 이야기를 한다면 에미넴은 그와 다른 성장배경을 갖고 있다. 거리에서의 삶을 회고할 수도 거리의 형제들을 호명할 수도 없다. 에미넴은 이혼한 부인과 자신의 어머니, 유명 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저격하고 백인 쓰레기라 자칭한다. 스트릿 크레드를 획득할 수 없는 태생적 조건을 미치광이 광대 캐릭터로 대신하며 승부를 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현실에 밀착된 방식으로 남성성이란 화두를 추구하면 갱스터와 마약상이 아니라 열등감에 사로잡혀 인정투쟁을 벌이는 ‘아다’가 탄생한다.     


뿐만 아니라 블랙넛은 로컬라이징이란 의제를 명확히 자각하고 그 자체를 창작의 서브 테마로 가지고 노는 래퍼이다. 그가 부른 ‘배치기’는 싸구려 토종 힙합의 대명사 그룹 배치기의 이름을 가져온 곡인데, 그는 역시 한국적 사이비 힙합 ‘발라드 랩’을 부르며 “힙합은 원래 그런 게 아닌데 막 총 쏘고 대마초 빨고 해야 개간지인데 너를 위해서라면 나 막귀가 될게 너를 위해 나 신토불이 할게, 꺼져 eminem”이라고 풍자한다. 미국과 한국의 콘텍스트 차이와 그에 따른 텍스트의 간극에 대한 장르 비평을 음악을 통해 개진한 것이며, 자기 음악의 폭력성이 실은 미국적 관습의 본질일 뿐이라고 비꼬는 것이다. 블랙넛은 간악하지만 굉장히 영리한 래퍼다.     


하지만 보다 성숙한 방식으로 로컬라이징을 수행하는 건 우원재 '시차'다. 그가 이 노래에서 미국 힙합의 관습 ‘허슬’을 재현하는 모습을 보라. 우원재가 작사에 접근하는 방향이 다른 래퍼들과 어떻게 다른지, 대중이 왜 우원재의 가사에 새롭다며 호감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 '허슬'의 용례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며 돈벌이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힙합이란 음악이 할렘가를 벗어나는 동아줄이며, 개인의 수완 외에 가난을 극복할 방도가 없는 미국 흑인들의 현실이 낳은 관습이다. 때문에 허슬은 마약 판매 같은 불법적 행위를 지칭하기도 한다. 미국 지향적 경향이 심화된 쇼미더머니 시대에 허슬은 스웨거만큼 자주 들먹여지는 클리셰로 수입됐다. 하지만 게토가 없는 한국에서 허슬은 음악적 다작을 칭하는 의미로 한정됐고 지역적 현실과 융합되지 않고 있다. "돈 벌어 돈 벌어" "나 죽고 나서 쉴게" “커져가는 돈벌이 돈 돈 돈벌이 워!”처럼 서사적 설득력이 아닌 동어반복의 상투성을 전시한다. "한국 힙합은 다 똑같다, 허세다"라는 대중의 피로감은 이해가 간다.     


우원재 '시차'는 작업에 몰두한다는 허슬의 요점만 취하고 가사의 배경과 내용을 자신의 현실에 맞게 조율한다. 그는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거리를 활보하는 게토의 마약상이 아니라, 교수님의 꾸중 때문에 문신을 감추고 강의실에 가는 힙합동아리 대학생이다. 밤을 새워 모니터 앞에서 랩 하고 뜬 눈으로 다시 강의실에 가는 게 그의 일과다. 그가 허슬을 통해 저항하는 것은 게토의 가난과 경찰이 아니라 모든 이의 일과를 한 가지 패턴의 초침에 맞추는 한국의 평생 입시제도다. "일찍 일어나야 성공한다"는 사회에서, 밤과 낮을 바꾸며 자신 만의 꿈을 뜬 눈으로 꾸고 있다. 이건 홍대 힙합 동아리라는 우원재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지만 보편적 공감대가 강력하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라면 무언가를 떠안으며 혹은 무언가로 탈출하며 낮과 밤의 시차를 바꾼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과제 수행이건 시험공부이건 공모전 준비이건 편의점 알바이건 취미 활동이건 간에 말이다. 이곳은 불면의 상태를 인위적으로 끌어내는 에너지 드링크의 과용이 이슈가 되는 사회 아닌가. "난 쟤들이 돈 주고 가는 파리의 시간을 사는 중이라 전해"라는 가사는 듣는 이들의 고되고 하찮은 일상을 낭만적 여행지로 초대하고 그들의 어깨를 두들겨 준다.     


창모가 ‘난 비닐하우스 출신 허슬러 돈 훔쳐’라고 하면 “니가?”란 말이 튀어나오고, 오케이션이 "돈 못 벌면 뒈지기로"라고 하면 "어쩌라고?" 싶고, 스윙스가 ‘게으른 래퍼’들 욕하며 잘 먹고 잘 산다고 뻐기면 “너 잘 났다”는 생각만 든다. 하지만 우원재와 로꼬가 '사호선 첫차를 타고 집에 간다'라고 말할 때, 듣는 이들은 티브이 속 랩스타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이렇듯 창작자의 개별성과 듣는 이의 개별성이 접속되며 보편성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래퍼가 직접 가사를 쓰는 작사 양식을 지닌 힙합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많은 래퍼들은 이미 돈더미에 오른 '과거완료형'의 가사로 허슬을 과시하고 이유도 없이 "혼자 화나"있다. 하지만 우원재는 세상의 비웃음을 올려다보는 ‘현재 진행형’의 가사로 자신의 왜소함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에 불복한다. 그는 게토의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자살률과 감정노동의 나라에서 정신적 폭력에 쫓기며 '알약'을 복용한다. 이런 진솔한 스탠스가 서정적 표현력과 어울려 “모두 비웃었던 동방의 소음이 어느새 전국을 울려대”라는 단 한 줄의 자기과시에 울림을 불어넣는 것이다.    

 

블랙넛이 열등감에 찬 캐릭터를 방패 삼아 나 보다 약한 자를 괴롭힌다면, 우원재는 항상 악과 분노에 받혀있지만 누구도 모욕하지 않는다. 오직 세상의 지배적 질서라는 나 보다 거대한 대상을 노려보고 삿대질하며 듣는 이에게 통렬함을 준다. '시차'는 근래 상업 차트에 오른 힙합 트랙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독창적이며 떳떳한 가사적 성취를 이뤘다. 한국 래퍼들은 이 신참 래퍼에게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워야 한다.


트럼프 시대의 정확한 타이밍에 도착한 영화 <설리



한국 평단이 <설리>라는 영화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의아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오래된 미국 공화당 지지자다. 그는 우익 파시스트란 칭호를 익히 세례 받았고, 작년 8월에는 힐러리와 트럼프 중 하나를 고르라면 트럼프란 발언을 했으며,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공개적으로 축하 메시지를 타전했다. 이런 인물이 만드는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이스트우드는 장르와 서사를 넘어 공동체에 관한 논평을 담는 감독이므로 이런 물음이 떠오르는 건 자연스럽다. 작가의 정치색에서 작품의 정치색을 도출하자는 논리가 아니다. 만약 그의 작품에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면 하나의 참고 문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콘텍스트로서 텍스트의 직조에 구조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요소다.

 

<설리>란 드라마의 시작과 끝은 미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와 설리의 갈등이다. 양자는 1549 비행기가 허드슨 강에 불시착한 사고의 사후 조사에서, 비행기가 새떼와 충돌해 날개와 엔진이 파손되었던 순간, 공항으로 회항해야 옳았는가 설리가 선택한 대로 비상착수가 옳은 결정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NTSB 조사관들은 별 맥락도 없이 모두가 기뻐하는 기적을 트집 잡는 것처럼 묘사되고, 확정된 결론을 향해 설리를 몰아가는 사냥꾼 같다. 이 구도는 작위적인데다, 각각의 인물들이 대립하는 가치관을 표상한다. 영화를 보면 첫눈에 들어오는 결절점이라 별생각 없이 흘려버린다면 이상한 일이다.

 

영화에 관한 주류 견해를 대표하진 않겠지만, 미국 slate지에는 이 점을 꼬집는 비평이 실렸다(‘Sully Is the Perfect Fantasy for Our Post-Fact Era’). 실화, 그리고 실화에 대한 수기에 기반을 둔 이 영화에서 NTSB와 설리의 갈등구도는 완전한 허구라는 것이다. 조사관들은 설리를 핍박하지 않았을뿐더러, 회항 시뮬레이션의 유예 시간 35초도 설리가 아닌 NTSB가 제안했다. NTSB의 전 조사관 Robert Benzon은 자신들이 왜곡되게 묘사되었다 지적하며 우리는 게슈타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NTSB는 관료체제와 공적 부문을 상징하므로 의도가 궁금한 각색이다. 사건 당시 조사관 Tom Haueter는 이런 각색이 정부의 무능력함에 대한 논거로 이용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설리>는 한국에서 흥행하지 못한 영화임에도, 국내 평단에선 많은 비평이 헌사되었다. 나름의 권위를 가진 지면에 게재된, 내가 읽어 본 비평만 7편에 달한다. 그중 한 편의 글도 이 문제에 이의 제기하지 않았다.

 

대신 예찬의 논조를 양분된 경향이 관통한다. 하나는 이스트우드 작가론에 입각한 글쓰기이고 하나는 세월호에 관한 회고다. 이스트우드 같은 거장의 작품을 논할 때 그의 전작을 거명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일은 따로 있다. 그렇게 작가란 좌표에 방점을 찍고 영화를 보면서 왜 작가의 정치성은 말하지 않을까. 미국에서 이스트우드의 필모그래피는 종종 정치적 설화에 휩싸였는데도 말이다. 작년에 일어난 허문영의 이스트우드 애정 철회 해프닝과 연결 지으면 양상은 거의 기이하다. 작가의 정치성을 작품의 콘텍스트로서 가늠하는 대신, 그 무게감에 짓눌려 작가를 포기하려 하거나 아예 없는 셈 쳐버리고 함구하는 것이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텍스트와 상관관계에 있는 작가의 정치색은 젖혀둔 채 텍스트와 일차적으로 무관한 한국의 재난사고만 말하는 건 어떤 이유일까. 강물 위로 비상 착수하고 155명 승객 전원이 구조된 사건에서, 승객 다수를 구조하지 못하고 선박이 침몰한 재난을 떠올리는 건 이해할만하다. 거기서 귀감으로 배울 것이 있겠지만 그건 영화가 아니라 1549 불시착 사고에서 배울 일이다. <설리>를 통해 배울 게 있다면 그 사고를 다루는 영화의 문법과 태도다. 몇몇 비평이 승객 전원이 구조된 사건이란 이야기 소재와 세월호를 곧장 대비하며 걸작이라는 상찬을 바칠 때 동의할 수 없다. 그런 태도가 영화에 관한 오인일뿐더러, 세월호를 인식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마저 든다.

 

<설리>가 말하는 바를 압축한다면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긍정과 맡은 자리에서 할 일을 해내는 개인의 윤리일 것이다. 이 두 메시지의 합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보통 사람' 모두가 영웅이라는 영웅주의의 전유가 일어난다. <설리>에 관한 많은 비평이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가령 살만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결국 저마다의 직업윤리라는 이동진의 20자 평이 그렇다. 한편 두드러지는 연출의 장치는 서사의 배열과 플래시백이다. 운항 수단을 활용한 재난 영화가 여행의 시작과 재난의 봉착, 구조와 귀환 같은 선형적 패턴을 흔히 취하는 것에 비해 <설리>는 재난 다음 날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재난 장면을 세 번의 플래시백에 걸쳐 분산 배치한다. 구조 장면은 다소 어정쩡하고 밋밋한 위치에 삽입하는데, 인명이 걸린 재난 상황을 클라이막스화하지 않은 윤리적으로 좋은 선택이다.

 

이스트우드는 설리의 과거사를 두 번의 플래시백으로 나머지 플래시백과 병치한다. 플래시백은 과거의 재생이며 때문에 이야기의 숨겨진 퍼즐 역할을 한다. 시간의 역진이 현실로 봉합되려면 누군가의 기억과 회고를 경유하기 마련이다. 플래시백은 근본적으로 주관적 장면인데, <설리>에 나타나는 다섯 번의 플래시백 또한 예외 없이 설리의 시선을 약호로 개시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번의 악몽/환영 장면은 설리의 내면으로 진입하는 이미지, 그의 트라우마와 결부된 순간, 사건의 진실과 연루된 단서란 점에서 다섯 번의 플래시백과 동질의 위상을 갖는다. 이런 연출은 상기의 메시지를 설리 개인에게 수렴하여 내면 드라마로 풀어가는 장치이다. 재난 사건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진실 찾기의 배경 서사로서 주변화된다.

 

주의할 것은 이스트우드가 설리의 내면적 갈등을 NTSB와의 서사적 갈등과 병존시키며 드라마적 갈등 구조를 이원화했다는 점이다. 서사적 갈등은 엔딩의 공청회 장면으로 수렴하며 설리의 판단과 사고에 관한 진실이 확증되며 해소되는데, 이와 함께 내면적 갈등 또한 불문에 부치듯 사라지는 결말로 끝난다. 가령 이 영화의 메시지가 인간에 대한 긍정과 개인의 윤리라고 할 때, 그것은 NTSB와의 대결 구도 속에 대립항으로 성립하는 가치이며, 최종적으로 설리가 옳다고 NTSB에게 승리를 거두며 공인된다. 때문에 그 메시지가 무엇을 부정하며 발화되는지 생각하지 않고, “살만한 사회를 만드는 건 저마다의 직업윤리라 정리하는 건 의미가 없다.

 

NTSB가 표상하는 건 시스템과 매뉴얼, 기술문명, 공적 부문이다. 설리가 표상하는 건 인간의 직관과 개인의 소명의식, 그 개인들의 각개약진이 합일을 이루게 하여 완전한 결과를 만들어주는 타이밍인데, 이는 공적 부문의 통제를 무색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 같은 것이다. 장병원은 영화에 공적 이미지에 대한 대결의식이 나타나 있음을 발견하지만 "<설리>에서 노인 이스트우드는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며 비판적 접근을 거둔다(씨네21, 클린트 이스트우드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그러나 영화에서 적출된 사항은 그 개인들의 할 일이 무엇인지 역할을 마련하고 가치를 규율하는 공적 네트워크의 의의다. 조재휘는 이스트우드는 시스템을 신뢰하고 매뉴얼대로 행동하면 어떤 위기가 와도 구조될 수 있는 세계를 그린다라고 평하는데(씨네21, '미국의 얼굴' 톰 행크스라는 아이콘) 이해가 가지 않는 해석이다. 비행기를 비상 착수한 설리의 결단은 매뉴얼 순서를 건너뛰고 관제탑(시스템)의 지시를 거스른 경험과 육감의 산물이란 명징한 사실을 떠올려 보라.

 

비상사태에서 임기응변이 요구되며 때론 인간의 경험과 직관이 시스템을 보충할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건 양자를 대립적 관계로 설정하지 않아도, 혹은 그럴 때 유효한 이야기다. 설리의 임기응변이 정확한 판단이었는지 따지는 건 차후에 더 정확하고 유연한 시스템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반대로 그런 단단한 시스템의 지지를 통해 개인의 임기응변도 효과를 낼 수 있다. 설리의 비상착수 후에 승무원들과 NYPD가 매뉴얼에 따라 승객들을 구한 것처럼 말이다. 이스트우드는 그걸 검증하려는 절차를 한평생 비행기와 살아온 노인의 삶을 부정하려는 시도로 묘사한다. 사건의 사실관계까지 각색하면서 말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재밌는 게 뭔지 알아? 40년 간 백만 명의 승객을 태웠는데 208초 사이의 일로 평가받는다는 거야란 설리의 대사가 그렇다. 이 말은 한 번의 '기적'으로 설리를 구름 위로 띄우고 바닥으로 팽개치는 세간의 태도 모두를 겨냥하는 영웅 신화에 대한 비판이며 설득력 있는 항변으로 들린다. 그러나 설리 '개인'에서 시스템으로 초점을 옮긴다면, 많은 인명이 걸린 비행 사고에서 기장의 특수한 판단이 평가 대상이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공적 부문에 대한 대결의식이란 의심스러운 구도를 가려주는 건 영화에 드리운 불투명한 정조다. 필름을 자욱하게 뒤덮은 우울과 불안의 정조, 그리고 깨끗하게 양단되지 않는 정치적 논조, 특히 영웅주의에 대한 다면적 접근이다. 이것들이 익숙한 주제의식과 단선적 서사에 깊이를 더해주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나는 이 구성에 논리적 정합성이 충분치 않다고 느낀다. 이스트우드는 특출한 결단을 내린 개인의 내적 흔들림을 조명하는 영웅주의 서사 구도를 채택하며 그것이 선사하는 서사적 매력에 천착한다. 그러는 한편 미디어 사회가 소비하는 영웅주의의 허구성에 대한 고발과 '보통 사람' 모두가 영웅이라는 주제의식을 영웅주의 서사 구도와 길항시킨다. 이 길항 관계에는 근본적으로 봉합되지 않는 균열이 있다. 설리라는 개인에게 너무 깊숙이 침잠해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그 개인의 틀을 해체해야 효력이 생기는 메시지를 송출하는 데서 오는 모순이다.

 

<설리>에 드리운 우울과 불안의 정조는 이야기가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압도적인 것으로 주어져 있고 안개처럼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설리가 겪는 우울함과 불안감은 비행기 사고의 결과로 배태되는 트라우마다. 이스트우드는 그 원인인 비행기 사고를 플래시백으로 러닝타임 중반에 배치하였고 그 결과인 악몽의 이미지로 영화를 시작한다. 우혜경은 이 이미지가 실은 불안이 아니라 안도를 나타내야 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씨네21, <설리:허드슨강의 기적>, ‘영웅주의 논쟁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반문). 이것은 관제탑의 지시대로 회항했을 때 일어났을 장면이며, 설리는 그를 예견하고 무사히 비상 착수하며 사고를 회피했기 때문이다. 우혜경은 여기서 설리의 불안의 방점이 승객을 구조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비행이 실패한 것이 아닐까에 찍혀있다고 추측하며, <설리>“<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둘러싼 영웅주의 논쟁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반문이란 추론으로 전진한다.

 

하지만 이런 어긋난 대응관계를 나름의 논리로 해석하며 봉합해주는 일은 불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그런 해석으로도 수습되지 않을 만큼 이 구도는 명백한 비논리이며, 이 한 대목에 한한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비상착수가 실패한 비행이라면 성공한 비행은 무엇인가. 설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공항으로의 회항이냐, 허드슨 강으로의 비상착수냐 두 가지밖에 없다. 사고 당시 조종실 상황을 녹음한 음성 파일은 진실의 결정적 퍼즐로써 공청회 장면의 마지막 플래시백으로 시각화되어 펼쳐진다. 이때 "고도 낮음, 지상 충돌주의"라는 경고 메시지가 반복해서 울리고, 설리의 시점 숏 상으로 건물들은 지나치게 가까이 있어 회항을 감행했을 때 추락할 것은 명확해 보인다. 즉 비상 착수 외의 성공한 비행의 가능성 같은 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설리는 왜 그런지 조사관들에게 이 정황을 강조하는 대신 자신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번민에 휩싸였다. 설리가 겪는 불안과 우울은 인과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가령 비행 도중 불시착했다는 사실 만으로 그토록 혼란감에 포위당하는 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는 저 악몽의 이미지에서 두려움이 아니라 안도감을 느껴야 하는 것은 물론, 비상 착수한 자신의 선택에 관해 의심이 아니라 확신을 품어야 한다.

 

이렇게 어긋난 구도가 생겨난 까닭은 뭘까. 우선 진실이 밝혀지는 공청회 장면에서 설리의 판단을 반론의 여지가 전무한 것으로 과시하는 데 지나치게 힘을 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트우드가 공동체에 관해 '가상의' 대립항을 맞세우고, 하나에는 부정적 함의를 다른 하나에는 대안적 함의를 담으며, 하나가 하나를 극복하며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상징체계를 엮었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악몽 이미지와 설리의 비상착수는 영화에 설정된 대립항 ‘NTSB 대 설리와 그대로 연결된다. 전자는 시스템의 지시대로 회항했을 때 도출되는 결과이며 후자는 그것을 거부하며 얻어낸 결과다.

 

<설리>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이미지로 시작했다가 그 추락을 회피하며 무사히 착륙하는 플래시백으로 끝나는 대구 구조를 취한다. 35초의 유예시간을 넣은 회항 시뮬레이션은 저 추락의 이미지가 실제로 구현되었을 현실이라 입증하는, 악몽을 현실화하는 결말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1549 추락 이미지가 9.11을 연상케 하는 것이 자명하다면, 이것은 공동체를 습격한 추락과 불안을 비상과 희망으로 재편하고 치유하는 기획에 다름 아니다. "뉴욕에서 비행기로 좋은 일이 일어난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는 시민들의 말처럼 허드슨 강의 기적을 공동체의 희망으로 온전히 정초하는 것이다. 오프닝 직후 설리는 NTSB에게 조사 받으며 추락이 아니라 비상착수였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자신의 선택을 아니 공동체의 악몽을 실패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묻어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9.11이란 사건의 의미다.

 

9.11은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이다. 세계 제일 강대국 미국의 심장부에 무슬림 무장단체가 가한 공습이었으며,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침략으로 응징했고 테러와의 전쟁을 벌여 이라크 전쟁을 개시한다. 21세기 아메리카의 십자군 전쟁을 연 서막인 것이다. 이런 사건을 15년이 지난 후에도 공동체가 치유해야 할 트라우마로 기억할 때, 그 밑바닥에는 강렬한 피해자 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미국이 가해자로 벌인 침략전쟁과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은 논외 되는 것이다. 가령 이는 이스트우드의 전작이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전설적 저격수 크리스 카일을 주인공으로 세운 <아메리칸 스나이퍼>라는 사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데, 오늘날 트럼프 시대의 도래와 함께 미국 각지에서 억제되지 않는 타자에 대한 증오가 대두하는 것에는 9.11에 대한 분노와 피해자 의식도 깃들어 있을 것이다.

 

이스트우드는 보통 사람의 대명사 같은 얼굴, 그래서 가장 미국적인 얼굴 톰 행크스를 주역으로 기용해 설리란 인물에게 국가와 역사의 상징적 맥락을 포갠다. 반복하여 이어지는 설리의 달리기 장면은 젊은 시절 톰 행크스가 출연한 <포레스트 검프>의 끝없는 달리기를 불러온다. <포레스트 검프>는 포레스트 검프란 인물 위로 미국 현대사의 파노라마를 펼쳐놓은 영화다. 시대는 흘렀으며 영웅은 늙었고 공동체는 위기에 처했다. 이제 달리기는 초강대국의 현대사를 이룬 근면한 질주가 아니라 상처와 두려움을 떨치려는 안간힘이다. 뉴욕 도심을 달리던 설리가 강가에 도착해 숨을 헐떡이며 바라보는 건 미국의 영광을 수호해 온 전투기다. 설리의 회상 속에서 그는 사고에 처한 전투기를 무사히 착륙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는 오늘의 추락 앞에서 과거의 비상을 떠올린다. 이렇듯 '강한 공동체'의 향수로 공동체의 상처를 위로하고 9.11이라는 사건이 추락이나 실패가 아니라고 다짐한다면, 사건의 정치적 맥락과 응당히 되새길 성찰 의식도 몰각되는 건 아닐까.

 

문제는 한국에서 <설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에도 있다. 많은 관객과 평론가가 허드슨 강의 기적에서 진도 앞바다의 비극을 떠올렸다며 벅찬 기분을 토로했다. 세월호는 시스템의 실패, 매뉴얼의 미준수가 빚은 참극이다. 1549 불시착 사고는 세월호와 많은 부분 대조된다. 그러나 개인의 특수한 결단을 클로즈업하며 공적 부문의 무능함과 시스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심지어 구조 장면이 주변화되어 극의 일부에만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설리>는 보는 내내 부끄럽다. 이 영화는 우리가 세월호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거의 모든 쇼트에서 내내 물어본다.”(정성일)라고 말할 때 당혹스러운 기분이 든다. 승객 전원 구조란 설정에 감응해 올 해의 베스트 영화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정지연,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라고 영화적 평가를 바치고, “<설리>는 매우 적절한 타이밍에 우리 앞에 도착한 영화”(FANTASY, 상승의 숏이 출현하는 순간)라며 황홀한 기분을 고백할 때, 그런 태도가 <부산행>, <터널> 같은 재난영화가 세월호를 다루는 소재주의와 멀다고 할 수 있을까.

 

터놓고 말하자면, 1549 불시착 사고를 다루는 이스트우드의 태도가 과연 윤리적으로 본받기만 할 것인지도 의문이 든다. 이스트우드는 재난 사고를 설리의 내면 드라마와 영웅주의에 대한 탐구, 공적 부문 비판의 배경 서사로 주변화한다. 또한 그 사고에 9.11의 이미지를 겹쳐 놓으며 당파적 주장을 꾀한다. 이것은 인명이 걸린 재난 사고의 개별성을 그 자체로 조명하며 존중하는 태도가 아닐 수도 있다. 물론 평자들(FANTASY, 장병원)이 말하듯, 이스트우드는 비행기 운항과 사고, 구조 장면의 플래시백에서 시점을 분산하며 거기 연루된 개개인의 개별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설리는 이렇듯 영화적으로, 윤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서로 충돌하는 시선이 공존하는 모순과 어긋남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영화다.

 

여기서 안도감과 두려움의 자리는 뒤바뀌어 있으며, 불안과 확신의 위치도 뒤집혀 있다. 우울과 불안의 자욱한 안개는 단선적이고 상투적인 엔딩으로 잘 수습되지 않고, “그들도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라고 대범하게 말하는 한편 그들의 시뮬레이션 조사를 컴퓨터 게임이라 폄하한다. 이스트우드는 절묘한 타이밍이 이룩한 시민들의 연대와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공동체의 토대를 이루는 공적 부문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각이한 주체들의 매뉴얼에 따른 헌신을 보여주면서 매뉴얼을 거스른 결단의 정당성을 배타적으로 웅변한다. 구조 장면에서 강조되는 건 휠체어를 탄 할머니와 그의 딸, 다리를 저는 노인과 젊은 아들, 달리기의 동력을 잃고 상처 입은 전통을 지탱할 백인들의 피로 맺은 유대감이다. <설리>는 마치, ‘보통 사람들의 선택이라는 민주주의의 본령으로 민주주의 정신을 부정하는 선택을 내린 2016년 미국을 영사하는 영화적 미문으로 꾸민 시대상처럼 보인다. SLATE 지에 실린 이 영화에 관한 비평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공격하며 '보통 사람'들의 브렉시트를 이끈 마이클 고버의 이 나라에는 전문가가 너무 많다는 말을 인용한 것에 수긍이 간다. 어쩌면 <설리>는 트럼프와 브렉시트의 시대, 그 정확한 '타이밍에 도착한 영화다.


<다른 길이 있다> 연탄가스 논란에 대해.

영화 <다른 길이 있다>에 출연한 서예지 배우가 자살을 기도하는 장면에서 감독의 종용으로 연탄가스를 마셨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일회성 해프닝이 아니다. 몰래카메라처럼 배우를 실제 상황에 몰아넣거나, 위험한 장면을 연기하지 말고 실행하라고 요구한 전례는 영화사에 많다. 작년 개봉한 <아수라>에서도 정우성이 김원해를 때렸고, 얼마 전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찍으며 말론 브란도와 공모해 마리아 슈나이더를 강간했다는 의혹이 일어났다. 이런 일들이 배우 인권침해란 건 논쟁할 가치가 없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렇게 '실재'를 추구한다고 영화적으로 의미가 있냐는 거다.

 

영화는 현실을 복제하는 매체로 태어났다. 그것은 카메라가 '거기 존재하는 것', 조리개 앞의 풍경과 움직임을 기록하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무기는 현실의 핍진한 묘사라 인식되는 한편, 현실의 묘사에서 해방돼 재현의 가능성을 이루는 것이 과제로 제시되었다. 부재하는 허구를 존재하는 현실로 보여주는 것, 이 존재와 부재 사이의 심연이 영화란 매체의 환영성을 빚어낸다. 영화의 리얼리즘을 거칠게 요약하면, 관객이 환영성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은폐하는 흐름과 영화의 환영성을 고백하는 흐름이 있었다.

 

영화에 연기가 아닌 실제 상황을 끼워 넣을 때, 허구를 넘어 현실이 되거나 실재가 출현하는 순간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영화는 현실의 재현일 순 있어도 현실 자체가 될 순 없다. 현실이 아닌 것이 현실이란 제스처를 취할수록 환영성이 강화될 따름이다. 물론 영화에서 실감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건 허구를 현실이라 간주하고 몰입하는 매체와 관객의 암묵적 합의가 성립하는 수단이다. <다른 길이 있다>처럼 어느 한 순간 연기를 실제 상황으로 대신하는 연출은 오히려 영화에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몰입의 리듬을 헝클어트린다. 이건 실감을 강조할 때 일어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보던 사람들이 스크린에서 열차가 달려오자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오늘날 관객은 백년 간 축적된 관람 경험으로 영화가 현실이 아님을 안다. 배우가 직접 수행한 위험한 스턴트와 고도의 리얼리티를 살린 세트와 액션 장면을 볼 때, "와 저걸 어떻게 촬영했대."처럼 영화 밖으로 빠져나와 허구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스펙타클에 반응하는 것이다. 감독의 의도대로 연탄가스 장면이 특별히 사실적으로 재현됐다면 다른 장면에 비해 그 장면의 인상이 불균질하게 남거나, 연기일지 혹은 진짜일지 진위가 궁금해질 수 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논란의 강간 장면에 대해 "나는 그녀가 분노와 수치심을 연기하길 원치 않았다. 진짜 분노와 수치심을 느끼길 원했다"라고 술회했다. 이런 발상은 꾸며낸 것이 아닌 순수한 진품을 원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뒤집어 말하면, 재현을 현실의 모상이자 현실 보다 열등한 차선책으로 보는 관점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깔고 있다. 이건 현실을 이데아의 모방, 예술을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을 다시 모방한 것으로 폄하하던 수천 년 전 플라톤의 생각이다. 내가 이해하는 예술의 가치는 현실을 똑같이 묘사하거나 현실이 되는 데 있지 않다. 재현의 특권은 현실을 재해석하며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다른 현실'의 비전을 현현시키는 것이다. 김여진 배우가 트위터에서 중요한 코멘트를 남겼는데, 이번 사건 같은 "날 것의 반응은 캐릭터의 반응이 아니라 배우의 생리적 반응"이란 것이다.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면 현실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또 다른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를 위해 고유성과 독립성을 갖추어야 할 것인데, 연기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그 현실을 사는 캐릭터의 고유성을 빚어내는 기예다. 서예지 배우에게 자신이 해석하고 구축한 캐릭터를 감독의 디렉션을 통해 재현하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있다면, 감독은 그 가능성을 닫아 버리고 신체적 반응을 뽑아내는 버튼으로 배우의 몸을 대상화한 것이다.

 

'실제 상황' 연출이 유독 섹스와 폭력, 고통과 죽음을 가시화하는 데 쓰인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것들은 본능과 욕망과 실존의 정수, 생의 밑바닥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고, 실행하고 구경하는 것이 금기시된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것을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보여준다'는 영화의 속성은 저것들을 다루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그래서 창작자들이 고통과 폭력, 죽음과 섹스의 땀구멍을 클로즈업하고 싶은 충동에 끌리는 것일지 모른다. 영화는 보는 자의 권력을 선사한다. 극장에서, 나는 세계를 살아내는 자가 아니라 세계의 구경꾼이다. 세상과 타인이 응시를 통해 대상화되는 그곳에서, 고통도 죽음도 몰락도 모두 남의 일이다. 그것들이 가하는 육중하고 파괴적인 작용은 날아가고 관음의 실감만 남는다. 그러면서 관객은 주인공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하며 눈물짓는다. 바로 이 점이 영화 보기의 윤리학을 요청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재현의 윤리가 폭력과 고통의 이미지를 우회하길 요청하는 것은 본다는 것이 그만큼 안전한 행위이고 그것들이 가진 무게감과 현실감을 오히려 소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 영화란 무엇일까. 나는 이 물음에 보수적인 대답을 갖고 있다. 보는 것의 전능감이 아니라, 보지 못함의 무력감을 선사하는 영화, 초월적 응시로 대상화된 그 곳에서조차 그렇게 쉽게 안 다고 말해선 안 되는 타자와 존엄과 비밀이 있다고 일깨우는 영화가 아닐까. 진짜 고통과 진짜 폭력과 진짜 섹스. 이런 외설적 상태를 보여줄 목적으로 실제 상황을 전시한다면 그것이 포르노와 스너프 필름과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소년 만화가 도덕과 폭력을 타협하는 방식

소년만화는 주인공이 힘을 키워가며 점점 더 강한 적수와 싸우는 배틀 장르다. 하지만 소년만화이기 때문에 폭력이 나쁘다는 교화적 메시지도 포기할 수 없다. 많은 소년만화가 이 딜레마를 처리하는 방법은 폭력에 대의명분을 부여하며 폭력을 수단화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한다거나, 최종적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이런 도덕적 정당화의 문법은 폭력을 전시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서사가 공유한다. 소년만화는 성장 서사이기 때문에, 그런 공적 포부와 더불어 주인공의 사적 포부가 병존한다. 나뭇잎 마을의 호카게가 되겠다는 야망을 쫓으며 닌자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공적 포부와 사적 포부의 병존이 무너지고, 주인공이 폭력을 수행하는 동기가 완전히 사적 차원으로 흡수되면 더 이상 소년만화가 아니다. 단순히 폭력적 충동으로 움직이거나, 복수와 욕망을 위해 싸우는 하드코어한 ‘19금’ 장르가 될 것이다. <베르세르크>가 그런 이야기다.  


공적 포부가 힘을 순치하는 도덕률이라면, 사적 포부야 말로 힘에 대한 순백의 도취를 띤다. 나루토가 호카게가 되고 싶은 이유 하나는 무엇인가. 마을에서 가장 강한 닌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소년은 더 많은 물체를 파괴하고 사람에게 확실하게 치명상을 줄 수 있는 ‘필살기’를 거듭 연마한다. 나선환에서 대옥 나선환으로, 또다시 수리검 나선환으로. <드래곤볼>의 손오공은 지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이지만, 그의 진정한 동기는 더 강한 자와 싸우고 싶다는 전투민족 사이어인의 본능이다.


폭력을 통한 평화의 쟁취와 폭력을 향한 내밀한 도취. 이야기의 본심은 둘 중 어디에 있는가. 소년이 쓰러 트려야 하는 ‘최종 보스’는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상황 논리가 아닌 쾌락 논리로 힘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정의감에 구애받는 답답한 주인공 보다, 이들의 거침없는 태도, 압도적 카리스마는 종종 훨씬 매혹적으로 그려진다. <드래곤볼>의 프리더가 우아한 말투로 “내 전투력은 53만입니다.”라는 대사를 뱉을 때 감탄사를 터트리고, <타이의 대모험>의 대마왕이 “노력해서 강해지고 그 힘으로 약자를 괴롭히면 즐겁지 않나? 너희는 안 그런가?”라고 당당하게 반문할 때 흠칫한 독자는 드물지 않을 것이다. 수단으로서의 폭력을 지지하는 주인공과 목적으로서의 폭력을 지지하는 최종보스가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에서 각자의 사상을 걸고 설전을 벌이며 이 딜레마를 표출하는 건 장르적 클리셰다. 소년의 의지에 찬 강변이 대마왕의 논리적인 웅변을 물리치는 방식으로 결론이 나지만, 미봉에 불과하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다.


소년 만화에서 도덕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을 넘어, 폭력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활용되기도 한다. 공동체에 더 큰 위기를 불러들이며, 평화를 지킨다는 이유로 더 스펙터클한 싸움판을 벌인다. 나뭇잎 마을을 구하는 싸움이 끝나면 제4차 닌자 대전이 벌어지는 것처럼. 심한 경우엔 이런 허술한 구실조차 유명무실한 농담으로 전락한다. 지구가 멸망하는 걸 왜 근심하겠는가, 드래곤볼로 되돌리면 되는데. 전사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마음껏 파괴를 수행하며 침략자와 싸운다.


폭력과 비폭력이 아니라 좋은 폭력과 나쁜 폭력을 대당 하는 건 논리적 오류다. 그것은 폭력을 부정함으로써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을 필요악으로 긍정하고, 폭력을 포기하기 싫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어쩌면 현실에서도 그것이 진실에 가까울 모른다. 대화로는 폭력에 항거할 수 없고, 내 안전을 지키는 반폭력은 정당방위다. 하지만 그렇게 될 때 약육강식의 세상이 도래하는 걸 막을 수 없다. 문명은, 그런 사적 폭력을 몰수하고 제도화된 공적 폭력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소년 만화에서, 국가의 존재가 삭제된 무정부 상태의 설정과 정부의 강권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초월적 싸움이 등장하는 건 이런 이유다.


이렇듯 공적 폭력의 개입이 제약된 상태에서 사적 폭력들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것과 가장 유사한 현실의 장소는 남자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교실이다. <원피스>의 대양과 <나루토>의 나뭇잎 마을, <드래곤볼>의 나메크 행성은 소년들의 삶과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속물화하는 경쟁 사회

“9급 공무원 VS 삼성 사원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 MLB PARK에 가면 늘 볼 수 있는 게시물이다. ‘VS 놀이라는 인터넷 게시판 문화의 한 버전인데, 수익과 안정성, 사회적 대우를 종합하면 어떤 직업이 낫냐는 거다. 레퍼토리는 다양하다. “IN 서울대학 VS 지방 국립대” “치의대 합격하기 VS 현금 10등등. 댓글 창에선 갑론을박의 패싸움이 벌어지고 무수한 호사꾼이 참전한다. 9급 공무원은 이 레퍼토리의 단골손님인데, “9급이 대체 뭐라고 아무 데나 들이 대냐라는 볼멘소리가 터진다. 이건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서열에 대한 배타적 의식과 강박관념 말이다. 대학 사회에 지방 캠퍼스 학생과 편입생을 멸시하는 호칭이 퍼졌다는 뉴스가 있었고, ‘지잡대라는 말은 이미 익숙하다. 왜 이런 일들이 유행하는 걸까. 두괄식으로 말하면, 서열구조가 강화됐기 때문이 아니라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문화비평가 아즈마 히로키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트의 논의를 빌려온다. 코제브는 헤겔의 역사의 종언 이후 남을 생존 양식으로 동물속물을 구분한다.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며 자연과 투쟁해야 한다. 동물은 자연에 순응하며 산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아무 데서나 배설한다. 한편 속물은 환경을 부정할 실익이 없음에도 구태여 부정하는 존재다. 속물은 부정을 통해 형식적 대립을 만들고 그것에 도취한다. 할복자살은 죽어야 할 이유 따위 없음에도 명예와 규율이란 형식적 가치에 홀린 채 스스로 배를 가르는 제의다.

한국 사회에서 계층 이동이 단절되고 삶의 질이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는 건 부연할 필요 없다. 과거 전문직 고소득 집단은 사자직업으로 불렸고, 입시 경쟁의 승자는 그 왕관을 쟁취해냈다. 서열화된 대학 역시 각각의 입학 등급에 따른 삶의 질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아직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명문대 간판이 곧 좋은 직장을 보증하진 못한다. 로스쿨 제도 도입 등으로 전문직 위상도 흔들렸고 직업의 안정성이 선호 체계의 우선순위가 됐다. 9급 공무원과 대기업 사원의 편익을 비교한단 건 옛날엔 상상할 수 없던 일인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현직 변호사가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 탈락했다는 뉴스가 충격을 퍼트렸다. 이렇듯 사회적 서열이 주는 실질적 효용이 축소되고 교란되는 상황에서, 그것이 상징하는 형식적 지위에 매달리며 상대의 가치를 부정하는 속물적 놀이가 퍼진 건 아닐까. 만약 삶에서 자연스레 차이가 나타난다면 굳이 나는 너와 다르다고 말로 강조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그래도 ‘IN 서울은 아직 다르다고, ‘삼성맨은 마흔에 명퇴 당해도 삼성맨이라고, 지방 캠퍼스는 서울캠퍼스 아래에 있다고 확인받으려는 거다. 이건 위악이 아니라 차라리 초조함이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이름의 책도 있지만, 10·20대로 갈수록 서열의식이 강화되고 있다는 관측도 그렇다. 그들은 승자의 효용은 줄어드는데 경쟁의 압박은 거세지는 시대에 학교에 입학한다. 만성화된 청년 실업을 나의 미래로 두려워하며 취업을 위한 스펙을 십대부터 준비한다. 스펙 인플레이션이 일어날수록 작은 차이라도 벌리려면 하나라도 스펙을 더 쌓아야 한다. 그렇게 아득바득 좁은 문을 뚫어도 명문대는 예전의 명문대가 아니다.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을 나만큼 대접해준다면 참을 수 있겠는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 아닌가? 이건 노력과 능력 없이 권리를 요구하는 무임 승차자에 대한 증오가 좌우를 넘어 사회에 퍼진 컨텍스트이기도 하다. 청장년 세대의 내면에 박힌 서열의식은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각인한 정서에 가깝다. 명문대 기득권을 없앤다든가, 지방 대학 출신을 우대한다든가, 계층 구조를 평평하게 다지는 방식으로 분배 정책을 실시할 때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부딪힐 개연성은 높다. 그것은 내 몸과 정신을 갈아 넣은 노오력의 시간을 매몰비용으로 묻어버리자는 얘기다.

나는 예전엔 능력주의와 차별의식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적나라하게 변주되는 맥락을 보자는 뜻이다. 과도한 경쟁 사회가 문제라고 할 때, 승리를 통해 보상을 얻는 구조가 나쁜 것이 아니다. 패자부활전을 열어주지 않는 구조, 승자가 모든 것을 거머쥐는 WINNER TAKES ALL의 경기장을 철거해야 한다. 경쟁의 순기능이 작동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회구조가 형성되던 산업화 시대에 시골 수재가 중앙 엘리트로 충원되었고, 노력을 하면 그 나름의 보상을 얻었으며 노력이 부족한 사람도 먹고 살 방도는 있었다. 사회 구성원들의 상승의지가 국가적 역동성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을 거다.

한국은 패자를 배제하는 것은 물론, 승자에게도 제대로 보상을 주지 않는 사회가 됐다. 한 줌의 최상위 계층이 권력과 재력을 상속하며 독점한다. 너나없이 시스템이 조립하고 갈아치우는 부품이며 더 이상 엘리트는 충원되지 않는다. 삼성 본사 사원증을 얻어도 마흔이 넘으면 치킨집 사장으로 추락하며 계층은 폐쇄적으로 순환한다. 이제 노력의 보답은 성공이 아니라 생존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리려면 인간의 의지로 감당하기 힘든 노오력을 퍼부어야 한다. 끝없이 앞날을 걱정하며 자신을 계발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평생 입시체제 속에, 그 노력을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은 삶에 대한 기본적 태도가 되어있지 않은 나태한 인간으로 보일 것이다. 경쟁이 허울이 되어가는 체제에서, 경쟁은 제도가 아니라 경기장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게 순치하는 허위의식이다. 그들은 승자의 녹슨 왕관을 놓고 대결(VS)을 벌이게 하며 변화의 동력을 이간질한다.

하느님 위에 건물주란 유행어를 알 것이다. 나는 이것이 넉넉한 여가와 안정된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을 가질 가능성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자신이 갈망하는 직업의 이미지를 노력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대상에게 투사하는 공상이라 생각한다. 물질주의적 선망과 대학교 VS 놀이가 천박해 보이는가. 그럴 것이다. 그들에겐 윤리적 각성과 결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잊어선 안 되는 것이 있다. 열정이 차이를 만들지 못하고 희망 대신 망상을 꾸게 하는 흡혈귀 같은 체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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